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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백범지기] 백범? 백범! - ‘김구의 사람들’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3-07-17 조회 625
첨부파일 00440692301_20120815.jpg



백범? 백범! - ‘김구의 사람들


2023년 백범김구기념관 서포터즈 백범지기

이호인

 

2차 미션은 백범 김구 선생의 생애를 소개하는 콘텐츠 제작입니다. 이 글에서 저는 백범 김구 선생님과 주변 인물들의 관계 및 선생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를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백범과 장준하


1946년 겨울 서울 우이동 화계사를 찾은 백범 김구(앞줄 중절모 쓴 이)와 장준하(오른쪽 뒤에서 두 번째 줄 안경 쓴 이)) 

사진 출처 :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47160.html


 

독립운동가, 언론인, 그리고 민주화운동가 장준하, 그와 백범의 인연은 1945131, 다른 학도병들과 함께 일본군을 탈출한 장준하가 중경(충칭)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 도착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임정 각료들과 함께 학도병들을 맞이한 김구 선생님은 환영사를 통해 여러분들은 숭엄한 조국의 혼이 살아있다는 증거.’, ‘너무나도 자랑스러워 다 함께 시내로 뛰쳐나가 시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며 감격을 표하셨고 장준하 선생님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평생 고초를 겪어 오신 선배 독립운동가들의 노고에 보답이 된다면 무엇이든 하라시는 대로 하고 어디든지 가라시는 대로 갈 것.’이라 답사를 올렸고, 환영식장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당시 임시정부는 이념 갈등을 포함한 파벌 싸움으로 인해 내분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때문에 크게 실망한 장준하는 임정의 주요 인사들 앞에서 일본군에 다시 입대해 임정 청사에 폭탄을 투하하고 싶다.’폭탄 선언을 하였습니다. 내무부장 신익희를 비롯한 일부 인사들은 사과를 요구하였지만, 임시정부의 주석이셨던 김구 선생이 직접 변호에 나서 사건이 일단락되었죠. 김구 선생은 기독교 신자였던 장준하를 장 목사라 부르며 아꼈다고 합니다.

 

이후 시안의 한국광복군 제2지대 이범석 장군 휘하에 배속된 장준하 선생은 미국 전략정보국(OSS)이 주관하는 특별군사훈련을 받고 국내진공작전에 참여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 무산됩니다. 19451123, 장준하 선생은 김구, 김규식, 이시영 등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함께 미군 수송기를 타고 귀국합니다.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로서 연설문을 작성하는 등 경교장의 여러 업무를 맡던 장준하는 당시 조선민족청년당을 이끌던 이범석 장군의 합류 요청을 받습니다. 고뇌하던 장준하에게 백범 김구 선생은 흔쾌히 양해를 표해 1946년 경교장을 떠나게 되죠. 그러나 이후로도 1948년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으로 방북할 때 수행원으로서의 합류를 요청 하였으며, 이후 통일 운동에 나서면서 백범의 통일운동은 우리 민족이 가야 할 가장 순결하고 애국적인 길이었다.’라고 평하는 등 김구 선생의 뜻을 잇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백범과 장제스


백범 김구와 장제스의 회담 기록화, 사진 출처 : 백범김구기념관 상설전시실


 

김구 선생이 임시정부 주석을 맡았던 시기 수십 년 동안 함께 긴밀한 관계를 가진 인물이 있었는데요, 바로 당시 중화민국 국민정부 총통 장제스(장개석)입니다.

 

1932, 김구 선생이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도한 한인애국단의 이봉창·윤봉길 의거사건을 계기로 장제스는 전폭적인 지원을 보냅니다. 수시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고, 김구 주석과 조선민족혁명당 김규식·김원봉 등을 설득하여 연합전선 구축을 권고하였습니다.

1943, 장제스는 카이로에서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 영국의 총리 처칠과 회담을 가집니다. 장제스는 김구 주석의 요청을 받고 한국의 자주 독립을 결의하는 내용을 성명문에 넣죠.

 

광복 후 김구 주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인사들이 충칭을 떠나기 하루 전인 1945114일 장제스 총통은 전별식에서 '조선독립을 위해 전력을 다하여 원조하겠다고 말하며 미화 20만달러(현 시가 20억 여원)을 지원합니다. (그러나 미군정의 거부로 국내에 들여오는데는 실패합니다.)

 

김구 선생과 장제스의 인연은 선생의 서거 이후에도 이어집니다. 1962년 대만 대사로 김구 선생의 아들인 김신이 부임하자 '자네 부친과 나는 항일 투쟁 동지였으니 자네는 나의 집안 사람이나 다름없네'라며 몹시 반가워하고 아꼈으며, 1963년 한국에 흉년이 들었을 때 김신이 타이완에 지원을 요청하자 김구를 각별하게 생각한 장제스는 각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특별 지시를 통해 쌀 5만 톤을 지원했습니다. 임시정부 수립 50주년을 기념하여 1969(김구 선생 서거 20주기이기도 했습니다.) 남산 공원에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 제막식 때 중화민국 고시원장 순커(중국의 국부 쑨원의 아들, 장제스는 쑨원의 후계자이기도 합니다.)를 특사로 파견하였으며, 자신의 친필휘호도 보냈습니다.

 

 

백범과 선우진



왼쪽부터 선우진, 김구, 김신, 1948419일 황해도 여현에 있는 38선상에서

사진 출처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백범 선생의 비서로는 여러 인물이 있었는데요, 그중 한 분이 바로 독립운동가 이시기도 한 선우진 선생입니다. 선우진 선생은 윗 문단에서도 언급된 장준하, 김준엽 등 학도병 50명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부설 한국광복군훈련반에서 3개월간 훈련을 받고 1945131일 중경 임시정부에 합류하며 처음으로 백범 선생을 만나게 됩니다. 이후 선생의 비서로서 활동하게 되죠. 19484,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을 위해 북행길에 올랐을 당시 선우진은 선생의 아들 김신과 함께 수행원으로서 함께하기도 했습니다.

 

1949626일 김구 선생이 서거하신 이후에도 선우진은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백범김구기념관 등에서 활동하며 김구 선생을 기리는 활동에 참여하였습니다. 그의 회고록 백범 선생과 함께 한 나날들에서 김구 선생에 대해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고, 개인 욕심이 없었으며, 비서들과 함께 보리밥을 먹을정도로 검소했다고 밝혔습니다.



 

백범 김구와 가족들


백범 김구 선생과 가족들의 사진, 사진 출처 : 백범김구기념관 상설전시실



백범 김구 선생의 가족들 역시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았습니다. 어머니 곽낙원은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할 당시 생사고락을 함께 하시던 분이셨습니다.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서 군사훈련중인 청년 20여명을 돌보았으며, 제때 식사를 잇지 못할 정도의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생활비를 아끼고 생신축하금으로 단총 2정을 구입, 독립운동에 쓰도록 하는 등 별세하기까지 김구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죠. 아내 최준례 역시 남편과 함께 안신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고 상해 임시정부에서 물심양면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등 사고로 사망하기까지 인생의 동반자로서 함께했습니다.

백범 선생은 부인 최준례와의 사이에서 32남을 두었습니다. 딸 셋은 모두 어렸을 때 사망했으나 장남 김인과 차남 김신은 모두 장성하여 아버지를 따라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습니다.

 

장남 김인은 1935년 열 여덟살의 나이로 한국독립당의 실무진으로 참여하였으며, 한국독립군 특무대예비훈련소의 감독관,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로서 군사 및 첩보 활동에 나서기도 했죠. 안타깝게도 폐병을 앓다가 1945329일 충칭에서 독립이 몇 달 앞두고 28세의 나이로 요절합니다. 김인의 부인이자 백범의 며느리인 안미생이 페니실린을 맞게 해달라고 애원했으나 김구 선생은 폐병으로 죽어가는 동지들도 그렇게 해 주지 못하는데 아들이라고 특별히 손을 쓸 수 없다며 거절한 일화가 있습니다.

 

차남 김신은 임시정부의 비밀연락과 임정요인들 간의 주요 연락 및 정보수집 임무를 맡았습니다. 19443월 한국독립당에 가입, 6월 임정내무부원 및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부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그 후 쿤밍의 중국 공군군관학교와 인도 펀자브성 라호르 시, 미국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의 랜돌프 공군기지에서 훈련을 받고 조종사가 되었습니다. 1947년 조선국방경비대에서 활동했으며, 1948년에는 국군 창설에 참여하고, 1949101일 창설된 한국 공군의 초대맴버로서 활동했지요. 남북협상 당시 아버지를 수행하며 함께 방북하기도 했답니다.

 

이후 6·25 전쟁에 참전하여 1952년 대한민국 공군 지휘관으로 '승호리 철교 폭파'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으며, 공군참모총장, 주 중화민국(현 대만) 대사 등의 직위를 역임합니다. 또한 독립기념관 이사장,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으로서 백범 김구선생을 비롯한 여러 애국지사들을 알리는 활동에 힘썼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이 가족의 공을 기려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김인) 추서,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김신) 수여, 199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곽낙원)을 추서 하였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과 교육활동, 독립운동, 의열투쟁, 군사활동, 통일운동을 함께하였습니다. 이 글을 통해 백범 김구 선생과 그와 함께하신 모든 분들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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