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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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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원

효창원은 조선조 제22대 왕 정조(正祖)의 장자로 5세에 작고한 문효세자(文孝世子)(1782∼1786)의 묘소 즉 효창원(孝昌園) 자리인데, 그후 이 경내에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성씨(宜嬪成氏), 순조(純祖)의 후궁인 숙의박씨(淑儀朴氏) 및 숙의박씨(淑儀朴氏)의 소생 영온옹주(永溫翁主)를 안장한 조선왕실의 묘원(墓園)이었다.

효창원은 지금의 효창동과 청파동 일대에 걸쳐 소나무·밤나무 등 수림이 울창하여 매우 유수한 곳이었는데, 1894년 5월 청일전쟁 발발 직전 우리나라에 불법으로 침공한 일본군의 주력부대인 대도(大島) 혼성여단이 지금 효창운동장 남단의 솔밭에 주둔하면서 효창원의 아름다운 경관뿐만 아니라 그 의미도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1924년 6월 효창원의 일부를 떼어서 효창공원을 개설하고, 패망 직전인 1945년 3월에는 문효세자 이하의 상기 묘소를 모두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당리 서삼능 경내로 천장함으로써 효창원은 그 의미와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특히 김구 선생의 묘소가 이곳에 위치하고 있음을, 그간 민족통일의 방책 등에서 이견을 보이던 이승만 영도하의 당시 집권세력에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었고, 그리하여 선열묘소를 교외로 옮기려는 움직임이 부단하였는데, 그 일단으로 1959년 봄부터 제2회 아세아축구대회 유치를 구실로 묘소 바로 앞에 효창운동장 개설을 추진하였다. 이에 독립투사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옹 등이 중심이 되어 효창공원선열묘소보존회(孝昌公園先烈墓所保存會)가 결성되고, 언론사를 비롯한 각계의 여론이 비등하여 묘소 이전은 보류되었지만, 효창운동장은 약 15만 그루의 나무와 숲 속의 연못 및 섬까지 희생시키고 끝내 1960년에 개설되었다. 이러는 동안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또다시 선열묘역을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용두리 서오릉 부근으로 이전하려고 추진하였으나 역시 유족과 사회각층의 반대로 보류되었다.

광복이후 조국에 돌아온 김구 선생의 주도하에 조국광복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신 이봉창(李奉昌)(1901∼1932)·윤봉길(尹奉吉)(1908∼1932)·백정기(白貞基)(1896∼1934) 의사의 유해를 고국 땅으로 모시게 되어, 1946년 7월 효창원의 중심지인 옛 문효세자 묘터에 국민장으로 안장함과 아울러, 안중근(安重根)(1879∼1910)의사의 허묘(虛墓;假墓)를 나란히 모셨다. 이어 1948년 9월에는 중국 땅에서 순국하신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및 주석 이동녕(李東寧)(1869∼1940) 선생과 국무원 비서장 차리석(車利錫)(1881∼1945) 선생의 유해와 군무부장을 역임하고 환국후 서거하신 조성환(曺成煥)(1875∼1948) 선생을 동남쪽 언덕에 안장하였다. 1949년 6월에는 임시정부 주석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 선생이 민족통일의 한을 품고 흉탄에 쓰러지자 국민장으로 서북쪽 언덕에 모시어 일대가 선열묘역이 되었다.

이같은 경로를 거쳐 1972년 서울시에서 효창공원 조경사업(묘지 진입로 및 석계단 설치·외곽 주변정리·수목 조성 등)을 10개년 계획으로 시작하는 동시에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으며 (이는 1981.6 유료개방 때까지 계속), 1977년 7월에는 건설부에서 효창공원으로 고시하였다. 1984년 12월에는 서울시의 협조로 각 묘소 앞의 묘표석(墓表石)을 새롭게 개수(改竪)하였다. 1989년 11월 의열사(義烈祠) 및 창열문(彰烈門)이 건립되고 묘역 확장과 정비가 대충 마무리되었으며, 1989년 6월 사적 제330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