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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 > 백범일지 독서감상문쓰기대회
| 제목 | 민족 앞에 가장 낮은 자리에 서다 ; 白丁凡夫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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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장서윤(오송고) | 개최일 | 2017-09-14 | 조회 | 3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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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앞에 가장 낮은 자리에 서다 ; 白丁凡夫 - 『백범일지』(김구)를 읽고 - 오송고등학교 2학년 2반 장서윤 뜨거운 8월이다. 잠깐 퍼부은 매서운 소낙비에 아스팔트 위 열기가 수증기로 어질거리는 숨 막히는 여름의 정점이다. 이 8월의 한 가운데 가슴 아픈 역사 속에 치열하게 싸워 쟁취한 우리의 광복절이 자리 잡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의 건국 시기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19년이냐, 1948년이냐를 두고 그 의미를 해석하는 논란은 솔직히 내게 큰 관심이 없던 부분이었다. 그런데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이 부분은 나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연히 위대한 민족 지도자로 알고 있었던 김구의 일생과 그 분이 살았던 치열하고 고통스러웠던 시대를 통해 내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평범한 상민으로 자라난 김구는 조선 왕조의 끝자락에서 신분 사회의 혼돈과 사회 구조의 모순을 목격하며 조금씩 의식을 성장시켜 나갔다. 그 당시 양반은 허울 좋은 이름을 걸친 채 백성들 위에 여전히 군림하고 있었고, 과거제를 비롯한 조선의 낡은 제도는 더 이상 기능을 유지하지 못한 채 무너져가고 있었다. 이미 사회 곳곳에선 ‘평등’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인식이 종교를 통하여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있었고, 공부하길 좋아했던 18세의 어린 청년은 스스로 동학에 입도하여 그 이듬해 접주의 자리에 오른다. 1894년에는 조선 최대의 농민 봉기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에 김구도 다른 접주들과 같이 농민봉기에 참전하였으나 같은 동학군의 공격으로 군대가 패하고 피신을 한다. 이 시기를 묘사한 김구의 내용을 통해 어림하여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한 이유도 짐작이 가능했다. 의를 가지고 일으킨 농민 운동은 진행되는 과정에서 결국 수많은 오합지졸들이 그들만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자들로 변절되었으니, 정부와 왜의 탄압에 종국에는 와해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실패 이후 중국으로 건너간 김구는 국내에서 일어난 단발령과 삼남 의병 소식을 듣고 다시 귀국하다가 우연히 몰래 변복하고 다니던 일본 육군 중위 스치다를 만나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보복으로 처단한다. 결국 이 사건으로 김구는 인천 감옥에 투옥되고 사형을 선고받기에 이른다. 모진 고문과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김구는 자살까지 기도했을 정도로 큰 고통을 겪었으나, 다시 마음을 다잡고 오히려 여러 서적을 읽고 공부하는 과정에서 서양의 근대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김구의 사형집행일에 고종 황제의 전화 한 통이 집행을 보류하게 만들었다는 극적인 이야기는 이전에 역사채널e를 통해 보았던 적이 있어 반갑기까지 하였다.
김구의 청년 시절 이야기는 그동안 많이 알고 있었던 것이 없어서 읽으면서 신기하기도 하였다. 동학 교도였던 그가 인천 감옥을 탈옥한 이후 마곡사에서 중이 되었다가 종래에는 결국 기독교에 입문하였으니 3대 종교를 다 섭렵했다는 사실도 신기했고, 위정척사론을 신봉하다가 이후 개화와 계몽에 뜻을 두고 근대 교육에 힘을 쏟은 내용을 보자니 교과서에서 배웠던 구한말 우리나라의 혼돈에 빠진 모습이 그대로 그의 인생에 투영되어 있는 것 같았다.
신민회와도 관련이 있던 김구는 그 유명한 안명근 사건으로 체포되어 다시 혹독한 옥고를 치른다. 일제의 날조로 유명한 이 사건으로 김구는 15년 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는데 이 때 만난 활빈당 간부에게 비밀 결사의 요령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다. 어쩌면 이를 기반으로 김구는 훗날 한인애국단을 이끄는 수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감형을 받아 나온 김구는 3·1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을 떠나고 1919년 드디어 창설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였으니 그의 나이 44세였다. 이후 김구의 일생은 곧 임시정부의 역사이기도 하였다. 그는 임시정부의 고난과 영광을 항상 같이 하였고, 해체 직전의 위기 순간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본인의 뜻을 동지들과 같이 실천하였다. 1931년 일본의 요인들을 암살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을 창설하였고, 그 결과 우리는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교과서에 실린 이봉창 의사의 활짝 웃는 생전의 마지막 사진을 보면서 늘 궁금했었다. 떠나는 길이 곧 죽음으로 가는 길임에도 어떻게 저런 밝은 미소가 나올 수 있었을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육신으로는 인생 쾌락을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도모하렵니다. 그래서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겠다는 목적으로 상해로 왔습니다.” 이봉창이 김구를 만나 한 이 말을 책에서 읽고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이렇듯 이봉창과 윤봉길을 비롯한 수많은 우리의 청년들이 기꺼이 나라를 위해 내놓은 목숨이 있었기에 우리 민족의 독립을 바라는 희망의 불꽃이 꺼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덕분에 임시정부는 활기를 찾는듯하였으나 이제 김구는 의거의 주모자가 본인이라는 것을 공표하여 일본의 집중 표적이 되었다. 더군다나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한 일본 때문에 임시정부는 대장정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1940년 중경에서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하였고, 41년 <대한민국건국강령>을 제정 발표한 이후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무렵 우리도 박차를 가해 연합군과 협력 활동을 하며 전쟁에 참전하였고, 더불어 광복군의 국내 진입을 위하여 피땀 어린 훈련을 하고 있던 차에 1945년 8월 뜻하지 않은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게 되었다. 김구는 이 소식을 듣고 희소식이 아니라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고 기술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년간 노력했던 우리 힘으로 일본을 우리 땅에서 몰아낼 기회를 한순간 잃어버렸던 것이다. 해방된 조국은 물론 그가 평생 바라던 일이었으나 앞으로 국내의 상황은 이 소식을 접했던 김구의 첫 느낌처럼 암울한 일들로 연속될 것임을 그도 당시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토록 원하던 조국의 땅을 당당하게 디디며 지방을 순회하는 감회를 기록하는 것으로 백범일지는 끝이 나지만, 그 이후 치열하게 대립된 좌우의 대립과 신탁통치의 위기, 남북분단의 위기 속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다가 1949년 안두희에 의해서 암살당하기까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사셨던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이 더할 수밖에 없다. 김구가 평생을 바쳐 그토록 원했던 조국의 광복은 수많은 애국 청년들이 던진 뜨거운 피가 채 식기도 전에 전 세계를 덮은 이념의 갈등을 끝내 비켜가지 못하고 결국 분단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나마 1950년 일어난 우리의 가장 큰 비극인 6·25전쟁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 다행이라 생각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슴 아픈 것은 그토록 광복을 위하여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겨 가며 싸워왔던 그가 해방된 조국에서, 그것도 일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같은 우리 동포에게 정치적 이유로 암살당한 것이다.
한편 1919년 3·1운동이후 상해에 세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 규모가 단촐하고 정부의 구색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말 그대로 '임시'정부이지만, 엄연히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첫 정부'이다. 지금까지 별 관심 없었던 최근의 건국절 논란에 대하여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 글을 읽은 후에야 나의 생각이 자리 잡히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정부는 1919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실제로 김구는 임시정부수립 이후 1919년은 대한민국 원년, 그 이후는 민국 2년(1920)과 같이 '민국'이라는 기원명을 사용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제의 지배에도 우리가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독립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지키고자 했던 그 의지를 후세의 우리가 쉽게 간과하면 절대 안 될 것이다. 매순간 평탄치 않았던 김구의 삶은 한 개인의 일대기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가슴 아픈 역사이기도 했다. 다른 이들과 똑같이 허울 좋은 양반 이름이라도 얻고 싶어 과거에 응시했던 어린 김구는 매관매직에 썩어버린 암담한 현실에 좌절했지만, 결코 그 좌절에 무릎 꿇지 않고 굳은 의지와 단호한 선택으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나갔다. 이것이 동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동경했던 이유이고, 지금도 우리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 이렇게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마지막 장에 실린 <나의 소원>에는 김구의 가장 유명한 말이 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항상 읽을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말이다. 그리고 부끄러워지는 말이다.
목숨이 위태로웠던 옥중에서 어느 날 그는 자신의 호를 새로 지었다. 민족 앞에선 가장 낮은 자리의 백정이 되겠다는 의미로 지은 ‘백범(白凡)’, 그 분의 마음을 알고 싶어서 마지막까지 책을 읽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선 그 마음으로 일생을 사셨으나 이젠 높은 곳에서 우러름 받는 백범 김구 선생이 그토록 바랐던 아름다운 나라를 우리는 감히 만들 수 있을까?
이 뜨거운 8월에 더욱 뜨거워진 마음으로 다짐해 본다.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그 분들께 더 이상 부끄러운 나라를 만들지 않아야겠다고... 가장 낮은 곳에 선 그 분의 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겠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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