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서평

분당영덕여자고등학교  백지원

서른여섯 해 동안 우리 민족의 빛은 일본의 강압적이고 기만적인 통치의 어둠 속에 묻혀 헤어나올 수 없었다. 식민통치 초에 일제는 조선에 무단통치를 실시하였다. 현역 군인인 헌병 사령관을 경찰 최고 책임자인 경무총감에 임명하는 헌병경찰통치를 실시하여 국내에 공포감과 위기감을 조성하였다. 조선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는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민족운동은 강력한 탄압을 받았다. 이와 같은 철저한 감시와 탄압 속에 많은 사람들의 일제에 대한 저항심과 적개심은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에 조명된 무기력한 지식인의 모습, 염상섭의 ‘만세전’에 나타난 일제에 의해 조선인이 착취당하는 현실에 분개하지만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못한 채 현실도피적 모습을 보이는 지식인의 모습. 이러한 소설 속 인물은 지극히 개인적인 인물이 아닌 당시 조선사회를 살아가던 이들의 모습을 대표하는 전형적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자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몇몇 애국지사들의 가슴 속에는 불면의 촉수가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조국의 현실을 개선하고자 남보다 한발씩 앞선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고 뜻을 같이 하는 자들끼리 결사와 동맹을 조직하여 조국 광복을 위해 힘썼다. 깨어있는 정신으로 시대를 인식하던 지식인들의 중심에 우뚝 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이자 민족의 지도자로서 조국을 위해 헌신한 자, 그의 이름이 바로 백범 김구이다.

백범의 긍정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왜인들이 을미사변을 일으켜 국모인 명성황후를 살해한 것에 대한 복수로 백범은 치하포 의거를 일으킨다. 치하포 의거로 인천감옥에 수감된 백범은 경무청에서 큰 소리로 왜인들을 꾸짖고 모여 선 사람들을 향하여 한바탕 연설을 한다. [여러분! 왜놈들이 우리 국모를 살해하였으니 우리 국민에게 이런 수치와 원한이 또 어디 있소? 당신들도 나를 본받아서 왜놈을 만나는 대로 다 때려죽이시오.] 이 부분에서 독자들은 백범의 담대하고 애국적인 면모를 잠시나마 접하게 된다. 자신의 육신과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가해지는 시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한 옳음과 정당함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그의 모습을 본보기로 삼고 싶다. 스스로를 ‘선하고, 도덕적’이라 여기던 당대 양반들의 일원이 아닌 상민에 해당하는 김구였지만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일제에 의해 국권이 위축되고 피탈당했던 그 시절, 우리 민족의 정신만은 온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수차례 심문장을 오가고 투옥되었지만 언제나 그 지조와 절개만큼은 굽힐 줄 모르던 그의 모습, 모진 고문 속에서도 더욱더 선연히 피어나는 백범의 정신은 단연 그의 자서전을 읽는 독자들에게 귀감이 된다.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의병이 조직되고 의병운동이 일어날 조짐이 일고 있을 때, 백범은 우리 민족과 조국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였으며, 민족의 항일 투쟁 의식을 고취시키고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을 분명히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가히 선구자적인 인물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백범의 모습은 개인의 실천, 행(行)함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민족운동이 일어나게 하는 불씨가 된다. 백범이 애국계몽운동을 하고 있던 1907년 당시 연해주의 의병 참모 중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제 1차 한일협약의 결과로 파견된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처단하는 장인환, 전명운 의거가 일어났다. 이재명은 민족을 배반한 이완용을 저격하여 의열 투쟁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백범 김구가 이 모든 의열 투쟁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진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일찍이 민족독립운동가로서 보여주었던 꼿꼿한 정신과 꺼지지 않는 불꽃과도 같은 그의 애국심이 동시대를 살던 개인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백범이 제시한 정신적 지표가 있었기에 그를 따른 독립운동가들이, 또 투쟁 단원들이 길을 잃지 않고 김구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백범 김구는 올곧은 정신과 신념의 푯대이자, 그의 뒤를 따르는 자들을 위해 불을 밝히는 등대였다고 하겠다.

백범의 독립운동에 긍정적 면모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독립운동에도 분명 한계점은 있었던 것이다. 김구의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고, 미국 OSS와 연계한 국내진입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임시정부와 OSS는 8월 20일 안으로 특공대를 조직하여 한반도에 진입시키려 하였지만 그보다 몇 일 앞선 8월 15일 일제의 패망 소식이 들려왔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라는 백범의 회고에서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그가 느꼈을 허망함을 짐작하여 볼 수 있다. [몇 년을 애써서 참전을 준비했다. 국내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중략)긴밀한 합작을 이루었는데 한 번도 실시하지 못하고 왜적이 항복한 것이다. 나(백범)의 생각은 서안에서 훈련을 마친 청년들은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부양으로 가서 그곳에서 훈련받은 청년들을 아울러 본국으로 보낼 예정이었으나 그 역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물론 김구 임시정부 요원들의 일제의 패망을 전혀 예감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국내진입작전과 같은 중대한 사안을 다루는 데 있어 그들은 사전에 국제정세의 흐름에 발맞추어 융통성 있는 계획을 도모했어야 했다. 백범과 임시정부 주요 임원들이 14개조항의 원칙을 결정하고 입국하려 할 때 미국은, 미국군정부가 서울에 있으니 일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환국할 것을 요구했다. 개인 자격 환국은 임시정부의 상징적 측면에서 통탄할 일이었다. 자주적 힘이 부족한 임시정부에게는 연합국의 통고를 수용하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러한 당시의 현실은 김구가 이끌었던 임시정부가 실질적으로 국외적 발언권이 미약했으며 자주적 국권을 행사하기 위한 실질적 힘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한계를 보여준다. 백범의 행적은 광복 이후의 현대사에서도 중요한 축을 차지하는데,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그는 엄연한 이상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정세에 따른 일본의 항복에 의한 광복을 맞았고 미국과 소련과 같은 외세의 개입은 불가피하였다. 광복 이후 신탁통치는 국내 하나의 쟁점이 되었고, 김구는 신탁통치를 철저히 반대했다. 이후 단독정부 수립 논의에 관해서도 그는 강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올곧은 신념에 기초한 주장들은 국제 정세의 흐름을 현실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이상적인 주장이었고, 따라서 현실에 적용하기 힘든 점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모습에 비추어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김구가 ‘나의 소원’에서 제시한 바람직한 조국의 모습은 분명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습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실행 가능성의 측면에서 무리가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국제사회에서 개별국가들이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해 볼 때, 또 필연적으로 국가 간 암묵적 간섭과 정치적 영향력이 행사되는 국제현실을 고려해 볼 때, 김구가 내세우는 이상 원칙들이 그대로 적용되기는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백범 김구가 추구했던 민족 통합의 정신만큼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어느 한쪽의 의견에 치우침 없이 양측의 의견을 모두 수용하라는 백범의 가르침은, 조선 중기 본래의 목적이 퇴색되고 변질되었던 붕당정치를 연상케하는 오늘날의 여야대립에, 연원을 알 수 없는 지역감정에 휩싸여 국가의 중대 사안이 올바르게 논의되지 못하고 결국 흐지부지되는 상황에, 우리 국토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선이 그어진지 반세기가 훌쩍 넘는 기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남북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는 우리 한민족에게, 조금이나마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해 주고 있다.

김구는 서당 교육 밖에 받지 않았고 그가 살았던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불의한 현실에 순응하고 타협하기는 쉬워도 저항하고 맞서기란 자신의 생명을 무릅쓰는 일이기에 결코 쉽지 않은 법이다. 일제강점기라는 민족 최대의 수난 속에서도 어떤 모진 고문과 달콤한 회유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굳게 지킨 모습, 동시대를 살아가던 다른 독립운동가들에게 모범이 되고 올곧은 신념의 푯대가 되어준 모습, 그리고 조국의 현실을 개선하고 민족의 수난을 극복하기 위해 민족지도자로서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준 백범 김구. 그가 추구한 이상의 현실성을 논하기에 앞서, 우리는 혼탁한 현실 속에서도 선연히 피어나는 백범 김구의 숭고한 정신을 먼저 받들어야 하지 않을까.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울창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수만 가지 꽃이 섞여 피어 봄의 화사하고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법. 백범의 정신을 본받아 질시와 반목, 대립과 투쟁을 버리고 우리나라, 우리국토가 진정한 화합의 장이자 건설적인 민족적 삶의 터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