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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백범지기] ‘독립’이라는 영원한 쾌락을 추구했던 이봉창 의사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1-10-08 조회 50
첨부파일 태극기 앞에서 사진찍은 이봉창 의사.jpg

 


독립이라는 영원한 쾌락을 추구했던 이봉창 의사

 

2021 백범김구기념관 서포터즈 백범지기 장명진

 

 

 

이봉창 의사 (출처: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한인애국단을 아시나요? 한인애국단은 1931, 백범 김구 선생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한 항일독립운동 단체입니다. 한인애국단은 일본의 중요한 인물들을 암살할 목적으로 결성된 비밀단체입니다. 한인애국단의 주요 의거 활동을 확인하다보면 유독 눈에 띄는 사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사진 속 인물은 목숨이 달려있는 의거를 계획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부터 소개할 이봉창 의사입니다.

 

 

 태극기 앞에서 사진찍은 이봉창 의사 (출처: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이봉창 의사는 1901810, 현 용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청파동의 문창보통학교(文昌普通學校)에서 학업을 마친 이봉창 의사는 어려서부터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과 용산역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는 등 생업에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상태였기 때문에 이봉창 의사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적은 월급과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적을 알아야 한다라고 결심한 이봉창 의사는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직장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192811, 이봉창 의사는 교토에서 열린 일왕 히로히토의 즉위식을 구경하러 갔지만 한글로 된 편지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유치장에 잠시 갇히기도 했습니다. 한국인인 그를 향한 차별은 변함없고, 식민지 백성은 결코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봉창 의사는 민족의식과 독립의식에 눈을 떴고, ‘독립된 대한민국을 만들고자 다짐하였습니다.

 

 

나는 조선인이니까 조선 독립운동에 몸을 바쳐서 우리 2천만 동포를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옥중수기

 

 

1931, 악화된 독립운동 상황 속에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의열투쟁을 전개할 특수조직인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습니다. 그리고 19311,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온 이봉창 의사는 김구 선생에게 독립운동을 위해 어떤 일이라도 할 것을 말하며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이봉창 의사가 매우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고, 일본인과 흡사한 행색이었기에 그를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의열활동의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며 독립에 대한 굳은 의지와 투철한 애국심을 보이는 이봉창 의사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은 김구 선생은 그의 한인애국단 입단을 허가하였습니다.

 

 

   이봉창 의사 선서문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 이봉창 의사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문

 

1932, 의거를 위해 일본으로 떠나기 전 이봉창 의사는 김구 선생과 마지막 기념사진을 기쁜 얼굴로 웃으며 찍으며 자신은 영원한 쾌락을 영위하기 위해 이 길을 떠나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며 오히려 다른 이들을 위로하였습니다. 거사를 앞두고 웃고 있는 이봉창 의사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만큼 이봉창 의사의 독립에 대한 의지와 염원이 매우 강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체포된 이봉창 의사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193218, 이봉창 의사는 일본 도쿄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폭탄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폭탄은 빗나가 일왕의 뒤를 지나던 궁내수 대신의 마차에 떨어져 일대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폭탄의 화력도 약했던 탓에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하였지만, 현장에서 체포된 이봉창 의사는 자신이 폭탄을 던진 사람이라고 말하며 당당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봉창 의사는 재판에서도 일왕을 처단할 목적이었음을 또렷하게 밝혀 당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결국 이봉창 의사는 같은 해 9, 비밀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1010, 일본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32세의 나이로 순국하였습니다.

       

 

이봉창 의사 의거 보도기사 (출처: 독립기념관


일왕 처단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한 의거였지만, 일본의 수도 한복판에서 한국인이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사건은 전세계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국제사회가 한국의 독립운동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특히 중국은 이봉창 의사의 의거 소식을 집중 보도하기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일제의 만주 침략과 친일파의 활동으로 인해 잠시 위축되었던 한국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어주었고, 이를 기점으로 독립운동이 되살아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삼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오는 백범 김구 선생 (출처: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일본 땅에 묻혀있던 이봉창 의사는 1946, 김구 선생의 도움으로 고국의 품으로 돌아와 용산 효창원 애국선열묘역에 윤봉길, 백정기 의사와 함께 안장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곳에, 그리고 독립을 맞이한 우리나라의 땅에 잠들어계시게 되었습니다. 이런 인연을 이유로 백범김구기념관을 오실 때 이봉창 의사의 동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태극기 앞에서 선서문을 달고 수류탄을 들고 서 있는 이봉창 의사 (출처: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수십년의 시간이 흘러 어느덧 20211010일이 되었습니다. 의거 직전에도 의연한 모습을 보인 이봉창 의사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움직인 것은 바로 우리나라의 국민으로서 대한독립이라는 일념 하에 목숨까지 바치고자 했던 살신성인의 결단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봉창 의사의 독립의식과 희생정신은 우리나라 국민 모두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독립된 나라에서 살고 있는 오늘, 이봉창 의사를 기억하고 그에게 감사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