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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독서감상문쓰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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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소개

수상작 소개 상세내용
제목 누군가의 이정표가 되는 삶을 위해
작성자 최인경(부평여중) 개최일 2021-07-09 조회 172

누군가의 이정표가 되는 삶을 위해



부평여자중학교


3학년 4반 최인경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가는 이 길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백범 김구 선생님이 남북연석회의 전후하여 자주 쓰던 글이다. 나는 과연 그의 길을 이정표로 삼아 걷게 될까? 이 글을 읽으면 그의 평소 신념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을 매일 성찰하며 조국의 자주독립을 간절히 원하셨던 그분, 백범 김구 선생님이시다.


얼마 전 방영된 꼬리를 무는 이야기라는 방송에서는 김구 선생님의 암살 사건에 대한 이야기의 진실을 알아보는 내용이 있었는데, 나는 그 방송을 우연하게 시청하게 되었다. 그런데 김구 선생님의 암살 사건 관련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수록 내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 이야기는 김구 선생님에 대한 내용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그 누구보다도 애쓰셨던 분이 광복 후 일본인이 아닌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암살되셨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고 슬펐다. 이 방송을 보던 시점이 <백범일지>를 읽은 후였기에 책의 한 구절 한 구절이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제 김구 선생님의 이야기를 <백범일지>를 통해 새롭게 되새겨 보고자 한다.

 

김구 선생님의 어릴 적 성함은 김창암이셨다고 한다. 김구와는 다른 느낌의 이름에서 뭔가 이름만 들어도 범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선생님은 장난기가 무척 많으셔서 부모님 속을 꽤나 많이 썩이셨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어릴 적 장난에도 한 소신 있으셨던 것 같다.

이런 선생님의 삶을 바꾼 건 바로 당시의 신분 사회였다. 당시 신분사회에 불만이 있으셨던 선생님은 글공부를 하여 과거를 보러 갔지만, 당시 과거의 부정부패에 큰 실망감을 느끼고 글공부를 더 이상하지 않으신다. 그 후 동학에 감명을 받아 입도하고, ‘아기 접주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동학 농민봉기 활동의 선봉에 서서 열심히 참여하신다.

내 생각에는 그 당시 동학은 정말 혁명이었던 것 같다. 조선 시대는 신분의 질서와 차이를 매우 중요시하는 사회였는데, 하늘 아래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동등할 수 있다는 사상이 양반이 아닌 일반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끌림이었을까. 그리고 동학 농민봉기 활동 중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안태훈이라는 진사분의 도움을 받게 된다. 진사 안태훈의 큰아들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안중근의사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두 인물이 대면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 후 김구 선생님께서는 세 번의 투옥을 거치고, 애국계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나는 그 중 첫 번째 인천감옥에서의 투옥 시절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 시절 김구는 왜놈 장교를 죽인 죄로 교수형에 처해지는데, 고종이 국모의 원수를 갚은 죄라는 구절을 보고는 김구 선생님의 교수형을 중지시키셨기에 그 후 김구 선생님께서 국권회복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으셨다. 이때 만약 고종이 형을 중지시키지 않았더라면 현재의 대한민국의 기틀을 마련한 역사적인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김구 선생님의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분야의 힘을 키워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 목적으로 보강학교 교장, 신민회 활동도 하시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셨다. 


온 국민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던 3·1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은 더욱 심해져가고,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한계에 부딪히자, 김구 선생님은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찾아간다. 내 나라를 우리 힘으로 찾겠다는 의지로 일제의 어떤 탄압에도 굴하지 않으셨던 김구 선생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이 되어 독립 운동가를 양성하고 지원하는 일을 하셨다.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봉창의사와 윤봉길의사, 이분들은 김구 선생님과 의기투합하여 국권회복의 길을 함께한 분들이다.

한인 애국단의 윤봉길은 김구 선생을 찾아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라고 했고, 1932429일 일왕의 생일과 전쟁 승리 기념식 날 폭탄을 던지기로 한다. 거사 당일 아침, 김구 선생님과 윤봉길 의사가 서로의 시계를 바꾼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윤봉길 의사가 죽음 직전에 자신의 시계를 김구에게 전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시계는 단순히 자신이 가진 가장 값진 물건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윤봉길 의사가 나라를 위한 희생을 선택하지 않았을 경우의 자신의 남은 인생, 자신에게 주어진 값어치 있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김구 선생님에게 자신의 시계를 전한다는 것은 김구를 믿고 의지하며, 앞으로 자신을 대신하여 김구 선생님에게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해달라는 의미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윤봉길 의사의 나라를 위하는 의로운 활동은 중국과 세계 여러 나라를 놀라게 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다른 나라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결과 우리 국군의 뿌리인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여 독립된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며 우리 힘으로 나라를 되찾고자 노력하는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모든 역량을 모아 준비하던 한국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은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실행도 하지 못한 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후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했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타국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을 맞이한 조국의 품은 그리 따뜻하지 않았다. 그 품에는 우리 국군이 아닌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김구 선생님의 남북 통합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은 허무하게도 미국과 소련의 외세 개입으로 결국 북위 38도를 기준으로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되었다. 김구 선생님의 남북 분단 상황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고자 했던 발걸음은 끝내 미완으로 끝났지만 언젠가는 김구 선생님의 그런 노력이 통일의 초석으로 자리매김할 거라고 생각한다.


김구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하셨다. 자신이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고,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하면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자신과 남을 모두 행복하게 해주는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지고 싶어 하셨다. 김구 선생님의 소원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큰 울림이 되어 선생님의 소원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모든 국민들이 노력하기를 원한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시며 가까우면서도 먼 중국 땅에서 독립 운동가를 양성하시고,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신 김구 선생님, 나는 선생님께 꼭 답해 드리고 싶은 것이 생겼다. 선생님, 선생님의 길은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이정표가 되어 주셨습니다. 저도 선생님의 발걸음을 따라 길을 잃지 않고 우리나라와 역사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의 첫 번째 문장을 나에게 다시 던져보았다. ‘오늘 내가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은 과연 누군가의 이정표가 되고 있는지……?’ 이 질문에 답이 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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