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에 대한 사랑의 불꽃을 품다. - 백범 일지를 읽고

강릉여자고등학교  김은지

아주 오랫동안 들어왔던 이름이었다. 그 두 글자, 김구. 그런 종류의 익숙함은 종종 앎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몇 분 걸리지 않았다.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쓰고 활짝 웃고 있는 모습과 그의 애국심을 보여주는 짤막한 일화 조각들. 그것 말고는 정작 알고 있는 게 없었다. 백범일지를 읽어 내려가는 내내 그 사실은 일종의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그렇지만 그런 덕에 결코 얇지 않은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나갈 수 있었던 듯도 하다. 호흡이 조금 긴 그의 문체 또한 내가 이해해야 할, 그의 삶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책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백범 선생은 자신의 생(生)이 담겨 있는 일지의 서문을 두 아들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대신한다. 짧은 글임에도 그것에서 오는 울림은 결코 작지 않았다. 어린 아들들을 만날 수 없는 설움, 그들이 성장할 나라를 온전히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느끼는 아버지의 글. 그것은 일종의 질책인 것 같았다. 살기 좋은 나라에 태어났으면서도 그러한 나라를 만드신 분들을 알지도 못하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은 우리들에 대한. 책의 서문이 일으키는 파동은 책장을 벗어나 마음속 깊이까지 퍼져나갔다.
백범 선생은 한없이 겸손했다. 어린 시절 저지른 만행들, 집안사람들의 점잖지 못한 행동거지, 쓰치다 라는 왜군 중위를 살해하는 장면의 잔혹한 묘사, 감옥에서 부린 추태, 잠시 동안 가진 안일한 생각 등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치부들을 거짓 없이 솔직하게 드러냈다. 그런데도 나는 그에 대해 조금도 비판할 수 없었다. 그의 진솔한 고백 앞에서 그런 생각은 큰 숲을 보지 못하는 편협한 생각이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자신의 신념을 세워나가고, 그것을 지켜나가는지를 지켜보는 것 자체가 하나의 배움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몇 번의 커다란 좌절을 겪었다. 한 번은 대의를 품고 응시한 과거시험에서 낙방한 일이다. 시관과 수험생 측이 결탁하는, 과거 시험장의 폐해를 목도한 그는 더 이상 학문에 뜻을 두지 않기로 결심한다. 다른 하나는 그 후 공부하기 시작한 관상학에서 배운 지식들을 동원해 자신의 상(相)을 분석했을 때였다. 그는 석 달 동안이나 자신의 상을 관상학에 따라 면밀하게 관찰한 결과 ‘어느 한 군데도 귀격, 무격의 좋은 상은 없고, 얼굴과 온몸에 천격, 빈격, 흉격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과거장에서 얻은 비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작한 공부인데, 오히려 그 이상의 비관에 빠져버렸다’고 그는 회고한다. 그러나 백범 선생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상서’ 중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새로운 결심을 한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身好不如心好
이를 보고 백범 선생은 과거에 급제하여 가난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던 자신의 모습을 심회하고, 내적 미(美)를 가꾸기 위한 방법을 고민한다. 그 고민의 답을 찾으려 노력하지만 실패하고, 동학당의 접주로서 겪은 패전의 아픔에 부딪혀, 그는 또 한 번의 좌절을 겪는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실수를 범하고, 반성하고, 후회하고, 좌절한다. 그렇지만 인간은 현명한 존재였다. 스스로의 불완전성에 대한 대안으로 우리는 ‘스승’을 가졌다. 세상을 먼저 산 사람으로부터 우리는 보다 옳은 판단을 하는 법을 배우고, 그것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인류의 번영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배움’의 과정이다. 이것은 지구상의 수많은 동물들 중 인간만이 갖는 고유한 행위이다. 백범 김구 선생에게도 이러한 스승이 있었다.
백범 선생이 열아홉 살이었을 때는 갑오년, 즉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던 해였다. 어린 나이에도 동학의 접주로서 담대한 기개를 떨치던 그를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부친인 안진사였다. 그 덕에 백범 선생은 안 진사의 집에 자주 놀러갔다고 한다. 안 진사 댁에 종종 들르는 , 기골이 장대하고, 의관이 매우 검소한 노인 한 분이 있었다. 그가 바로 훗날 김구 선생이 한평생 스승으로 여긴 고능선이다. 잇따른 좌절에 생(生)의 방향감을 상실한 스무 살 백범에게 고선생과의 만남은 한 줄기의 태양 광선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다시 삶의 목적을 찾았고, ‘밥을 안 먹어도 배고픈 줄 모른다’고 할 정도로 정신적 풍요로움을 느꼈다. 그에 따라 그의 미성숙하던 민족의식도 점차 성장한다.
스승이라는 존재가 한 인간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모습은 내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성장한 지난 십 년간 만났던 선생님들을 떠올려보았다. 모두들 훌륭한 분이셨다. 한 분 한 분 떠올릴 때마다 내 마음은 감사함과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과 그 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채워져 갔다. 그 분들이 주신 가르침 하나하나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이었다. 그 한없는 사랑에 어떻게 보답해야 하나 하고 아득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지만 매 순간 그 시점에서의 내 모습을 선생님들께서 보셨을 때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보은(報恩)이 아닌가 한다. 그 분들은 우리들이 참된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을 바라실 테니까.
청년 김구는 고선생을 믿고 따랐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승이 주는 가르침은 무조건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스승의 가르침이 옳다고 여겨질 때 그는 몸과 마음을 다해 그것을 깨쳤고, 곧바로 실행에 옮기고자 했다. 반면 스승의 가르침이라도 옳지 못하다고 판단되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했고, 자신의 소신을 당당히 밝혔다. 개화에 대한 백범의 태도에서 이를 엿볼 수 었다. 백범은 쓰시다라는 일본인을 살해한 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천만 다행으로 그는 간발의 차로 도착한 고종의 칙서로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그는 사형수로 감옥에 투옥되어 있을 때 아버지에게 부탁해, 책 신(新)서적을 읽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일 필요성에 대한 깨달음은 고선생의 가르침 중 하나였던 ‘존중화양이적(尊中華攘夷狄)’, 즉 중국을 높이 받들고 서양 세력을 물리치자는 사상과 대치되는 것이었다. 그는 스승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깨달음을 저버리는 대신, 스승과 직접 논쟁을 벌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비록 김구 선생의 이런 올곧음이야말로 그가 격동의 시기였던 구한말에서 광복까지의 시간을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한다.
비록 개화에 대한 견해에서 차이를 보였으나 백범에게 있어 고선생이 평생의 참된 스승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는 스승의 임종을 곁에서 지키지 못한 제자의 안타까움이 절절히 느껴지던 그의 말을 떠올려 본다.
"아, 슬프도다! 이 말을 기록하는 오늘까지 30여년 동안 내 마음을 쓰거나 일을 할 때,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이 여기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당시 청계동에서 고선생이 나를 특히 사랑하시고 심혈을 다 기울여 구전심수(口傳心授) 하시던 훈육의 덕일 것이다. 다시 이 세상에 그같이 사랑하시던 위대한 얼굴을 뵙지 못하고, 다시 그 참되고 거룩한 사랑을 받지 못하겠으니, 아 슬프고도 애통하도다!"
이렇듯 정이 많았던 김구 선생이었지만 주위 사람들의 죽음에 그는 놀라우리만치 의연했다. 그래야만 했다. 한인 애국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이던 김구(金九)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한인 애국단은 일본의 소수 지도자를 암살하여 독립을 쟁취하는 데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비밀 결사조직이었다. 일본의 고위 관료들을 살해하고 안전하게 빠져나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한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사지(死地)가 될 곳, 그들의 숭고한 희생이 헛되이 잊혀지지 않을 곳을 알려주는 일. 그것만이 꽃다운 나이에 아까운 목숨을 내던지고자 하는 젊은 독립투사들에게 그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떠난 사람보다는 남은 사람이 더 괴로운 법이다. 백범 선생은 많은 이들과의 이별을 혼자서 감내해야만 했다. 모든 감정을 절제하며 그가 써내려간 수기들에서 외로움을 느낄 수 있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혼자서 그 무거운 짐을 지고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른 채 역사의 책장을 넘기고자 고군분투했던 백범 선생. 그는 민족의 빛이었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물러서지 않고 온몸으로 전진했던.
1945년 8월 15일, 일본에 떨어진 두 기의 원자폭탄으로 일본은 항복을 선언한다. 그것은 곧 갑작스러운 광복을 의미했다. 그토록 염원했던 광복이건만 김구 선생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광복군을 조직하고, 일제에 대한 무력 총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그의 오랜 노력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보지도 못하게 되었으니. 광복의 기쁨을 저해한 것은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나의 소원’에서 그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광복 후 떨리는 마음으로 입국해서 맞닥뜨린 한국의 현실은 그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소련과 미국의 신탁통치로 해방 조국은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그릇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또다시 뛰기 시작한다. 조국은 하나여야만 한다며, 한 핏줄끼리 총을 겨누어서는 안 된다며 그는 일흔이라는 연륜도 잊고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화합의 건설을 역설했다.
“...우리의 용모에서는 화기가 빛나야 하며, 우리 국토 안에는 언제나 춘풍(春風) 태당(駘蕩)하여야 한다...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을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그는 자신의 나이가 많아, 국민 교육에 직업 뛰어들 시간이 얼마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듯하다. 그의 삶을 아무런 수사도 없이 그대로 담은, 백범일지야말로 가장 오랫동안 남아 대한의 가슴속에 깊은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을. 그의 삶은 우아하지 않았다. 도무지 아름다운 구석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그의 삶에는 그런 사소한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인한 무언가가 있었다. 스무 살 청년 김구를 타오르게 했던 것. 그것은 사랑이었다. 민족 전체에 대한 한없는 애정. 무정한 일제 강점의 현실을 꿋꿋이 헤쳐 나아갈 온기를 백범은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백범 김구. 이젠 두 글자가 아닌, 네 글자를 ‘알게’ 되었다고, 감히 자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