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좋은 사람의 의무 - 김구 선생님의 <백범일지>를 읽고

부산양정고등학교 서상민

 지난 7월 말 동아시안컵 한일전이 열린 잠실경기장에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글귀가 적힌 플래카드가 펄럭였다. 욱일승천기를 휘두른 일본 응원단에 대항하여 우리 응원단이 이순신 장군과 안중근 의사의 사진과 함께 내건 것이다. 현재 일본의 우경화 정세를 지켜보면 ‘역사를 잊은 민족’이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말한다. 시간이 흘러도 인간의 본연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의 일은 과거에도 일어난 일일 수 있다는 말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지나간 역사가 현재에도 되풀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픈 역사를 교훈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과거 독일 나치의 홀로코스트나 일본의 생체 실험, 위안부 사건 등의 만행은 인류의 뼈아픈 역사로 깊이 새겨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일제강점기라는 고통의 역사를 가진 한국인을 앞에 두고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욱일기를 꺼내들거나, ‘나치식 비밀 개헌을 배우자’는 등의 발언을 하는 것은 일본이 과거사의 잘못을 잊었으며 과거의 만행을 반복할 수도 있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감옥 재판소에서 왜놈 순사를 향해 꾸짖던 김구 선생님의 호령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독립운동가 분들의 피땀 어린 분투도 떠오른다. 우리마저 역사를 잊은 민족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백범 김구를 비롯한 독립투사 분들의 뜻을 떠올리고 국가와 민족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 ‘백범일지’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김구 선생님의 개인적인 일지만이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와 일제강점기의 사회상, 당시 우리 민족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출간 된지 60년도 더 지난 이 책이 여전히 빛을 발하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상권, 하권, 나의 소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김구의 어린 시절에서 중국으로의 망명까지를 다룬 상권의 이야기들이 나에게는 가장 큰 귀감이 되었다. 동갑인 18세의 김구, 즉 김창수는 동학 접주로서 밑에 수천 명의 연비를 두고 있었다. 지금 나의 모습과 마치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장수마냥 어엿한 저 김창수의 모습이 대비되어 나에게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관상 공부를 하던 중 자신의 상이 온통 흉격인 것을 알게 된 김구는 크게 절망하는데 상서에서 한 문구를 읽고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김구는 이때 ‘마음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나는 김구의 주위에 수천의 연비와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모이도록 한 힘이 이 마음가짐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단순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 결심은 김구의 인품과도 맞닿아 있다. ‘마음 좋은’이라는 다소 모호한 개념은 최소한 김구 개인의 내면화된 윤리적 판단에 행동이 어긋나는 일은 없도록 할 것이다. 김구의 내면이 악하지만 않다면 설령 그것이 개인적 판단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항상 옳은 일을 실천하도록 하는 힘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실천은 독립운동에까지 이어질 수 있다. 부당한 억압과 폭력으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키는 일은 분명 마음 좋은 사람으로서의 의무다.

 열아홉의 나이로 동학 농민 운동의 패장이 된 김구는 청계동의 안 진사에게 몸을 의탁하던 중 유학자인 고능선 선생을 뵙게 된다. 그 후로 김구는 고 선생의 사랑을 드나들며 유학 경전뿐만 아니라 의리와 사람으로서의 도리, 국사(國事)에 관한 가르침을 받는다. 후에 고 선생은 안 진사가 천주학을 배우려 한다는 이유로 절의를 한다. 고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서양 오랑캐의 글을 배운다는 것인데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유학자들에게 신학문은 배척해야 할 변방의 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안 진사와 고 선생의 뜻이 하나로 수렴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온건개화파, 급진개화파, 위정척사파, 동학 등 나라를 살리자는 뜻은 같으나 그 방식에 있어서 차이를 둔 당대 지식인들의 충돌은 불가피한 일이 아니었을까.
 과거에나 지금이나 이러한 충돌은 늘 존재한다. 김구는 ‘나의 소원’에서 ‘철학도 변하고 정치, 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어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라고 하는데 안 진사와 고능선의 대립이든 개화파와 척사파의 대립이든 ‘지내어 놓고 보면 그것은 일시적의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에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는 말이다. 서로가 구국이라는 목적과, 하나의 민족이라는 영원성을 안고 있다면 좀 더 시야를 넓혀 다툼은 일시적임을 깨닫고 방식이 어긋난다고 해서 적대시하기 보다는 서로서로 부족한 것은 채워주고 좋은 것은 살려 공통된 큰 뜻에 한발 더 나아갔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이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 김구는 무엇보다도 교육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105인 사건으로 서대문 감옥에 입감한 김구는 그곳의 의병장들과 교제를 하는데 그들 중 대다수가 의병을 일으킨 목적도 국가가 무엇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들은 무기를 들고 약탈을 일삼은 것을 그저 잘한 짓으로 알고 있었다. 을사년에 나라가 팔렸을 때조차도 합병이 무엇이고 망국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농민들이 많았다.
 우리 민족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으며 국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독립이 필요한지를 알아야 했다. 김구는 광진학교를 세웠으며 경신여학교, 서명의숙,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 여러 학교의 교단에 올라서서 국민들의 계몽에 힘썼다. 김구 선생님 같은 분들이 없었다면 학생들 모두가 일제의 세뇌 교육을 받으며 자랐을지 모른다. 어린 시절의 학습 경험은 자라서도 영향을 준다. 그들이 자라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국가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교육은 가장 절실한 사업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백범 김구는 교육자로서 만이 아니라 독립운동가로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국모를 시해한 왜놈을 죽인 사건인 치하포 의거로 투옥 되었을 때는 죄수가 아니라 기인으로서 도리어 대접 받기도 했다. 육체는 꽁꽁 묶여 있었지만 정신이 묶이지 못한 탓에 바른 소리가 계속해서 감옥 내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고종 황제의 귀에까지 흘러들어갔다고 하니 그 의지력은 가늠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안악 사건으로 신문을 당할 때에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결코 신념을 굽히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의지는 이리저리 휩쓸리며 자신을 지키지 못한 채 그때그때 제 편한 방식대로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 또한 나와 변치 않을 약속을 맺었다고 하면서도 이건 어쩔 수 없는 경우이고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며 그것을 쉽게 깨버린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으로서 늘 안고 있는 당연한 문제일지 모른다. 하지만 짐승과 비교하여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것이 이성, 사유이며 의지다. 이 의지를 극한으로 밀고 나가 어떠한 육체적 고통, 고문뿐만 아니라 유혹에도 굴하지 않는 정신을 소유한 김구 선생님이 인간으로서 가장 참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강한 의지력을 가질 수 있을까. 실천하려 하지만 그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비범인과 범인의 숙명적 차이라고 해둘지, 하지만 이것 또한 자기 합리화가 아닐까. 김구 선생님처럼 큰 뜻을 품고 있지는 않지만 나도 나름대로의 꿈을 가지고 있다. 내 나이대의 김구를 가르치셨던 고후조 선생의 말씀이 떠오른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본뜻을 가진 이상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 실패니 곤란이니 하는 것들을 겪은 것이 무슨 대수겠느냐, 본뜻만 변치 말고 쉼없이 고치고 쉼없이 전진하면 필연코 목적지에 다다를 날은 오게 마련이다.’

 마음먹은 대로 다 되는 일은 없다. 실패했을 때 길게 보면 이것은 한 과정임을 떠올리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새겨두고 쉼 없이 노력해야겠다.

 자금난에 허덕이던 임시정부 시절, 가장 유명한 사건은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일 것이다. ‘한인 이봉창 저격일황 불행부중’ 당시 중국 언론에 실렸던 기사다. 당장에 그 신문사를 때려 부쉈다는 일본은 그 사건을 테러로 보도하길 원했을 것이다. 단순히 입장에 따라서 의거이고 테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극우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 중에서도 이 사건을 테러로 평하는 자들이 있다. 깊이 생각하고 반성해야 할 문제다.
 그러던 중 독립이 되었다. 그간 세운 계획이 모두 허사로 돌아갔으니 허무한 감이 먼저 들었을 테다. 자력에 의한 독립이 아니었다. 게다가 완전한 독립도 아니었다. 한민족은 북과 남으로 갈려 이념이 다른 각자의 정부를 세우게 되었다. 백범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전쟁(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이 세계는 다시 두 개로 갈렸다. 이로 인하여 제 3차 전쟁은 시작되고 있다.’ 그토록 바라던 독립의 기쁨을 맛 볼 새도 없이 이념의 대립으로 인한 또 다른 비극을 예견하고 김구 선생님은 1949년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1년 후 그 비극은 실제로 일어났고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지금 철조망은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김구 선생님은 하늘에서 웃고 계실까, 울고 계실까. 평생을 조국, 민족, 독립을 위해 바치신 분이다. 그 혜택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우리들은 삼일절(3.1)을 ‘삼점일절’이라고 읽으며 배불리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이미 죽은 사람이 이랬든 저랬든 우리와는 관계없다. 역사의 중요성이 피부로 와 닿지가 않는 세대이다. 하지만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하면 언제든지 발끈하는 것이 우리들이다. 우리가 그 땅의 주인이라는 뿌리를 알기 때문이다. 뿌리를 아는 것이 바로 역사다. 우리의 뿌리에 대한 인식은 강한 정체성을 불러온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아니 흔들린다 하지 않았는가. 백범일지를 읽으며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모두가 바른 역사관을 가지고 자긍심을 키워 나갈 때 김구 선생님은 크게 웃으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