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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한민국 건국과 백범 김구선생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08-05-19 조회 25426

 



대한민국 건국과 백범 김구선생


 



신용하(이화여대 석좌교수)



최근 일어나고 있는 오해의 하나로 대한민국 건국에 백범 김구선생이 반대했다거나 참여하지 않았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전적으로 오해이다.

백범은 이미 독립운동 시기에 해방 · 광복 후의 “대한민국 건국”을 위하여 누구보다도 가장 앞장서서 맹렬히 활동하였다. 그 증명의 하나가 백범이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적극 주도하여 제정 반포한 1941년 11월의 <대한민국 건국강령>이다. 이 건국강령에서 호칭한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광복 후 서울에서 건국될 “대한민국”이었다.

<대한민국 건국강령>은 주석 백범이 주도하고 외교부장 조소앙에게 기초하도록 하여 다시 백범이 의정원에서 통과시키고 채택하도록 주도하였다.

이 <대한민국 건국강령>은 1945년 광복 후 1948년 서울 “대한민국”의 제헌의회에서 제정한 “대한민국 헌법”에 거의 전부가 반영되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도 임시정부의 그것을 계승한 것이고, 제헌의회도 의장의 개막연설에서 임시정부의 의정원(의회)을 계승한 것임을 명백히 하였다.

백범은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선포한 직후 12월 8일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자, 12월 10일 일본에 대한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문”(선전성명서)을 다시 발표하고 광복군을 연합군과의 협동작전에 적극 참여시켰다.

서울에서의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임시정부에 좌파 포용 정책을 실시해서, 1942년에는 김원봉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에 성공했으며, 1943년에는 의정원(국회)에의 좌파 참여를 성공했고, 1944년에는 임시정부에 좌파를 모두 참가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하바로프스크 88여단에 있던 김일성까지도 백범에게 편지를 보내어 임시정부에의 합작과 광복군 최종작전에의 참가 희망 서한을 보내어 중국공산당의 유아류 · 로동생 · 왕붕에게 전달을 맡겼으나 이들은 해방 때까지 이 서한을 전달하지 못했다고 그의 회고록 제8권에서 밝혔다.

만일 연합군이 38도선을 획정하여 조국을 분단시키지 않았다면 백범이 지휘하던 임시정부 주도로 서울에서 통일된 “대한민국 건국”이 이루어졌을 것임을 내다보는 것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온 겨레가 애타게 기다리던 1945년 8월 15일 조국해방의 환희는 미 · 소에 의한 38도선의 남북분단의 고통을 수반하였다.

중경에서 백범은 1945년 9월 3일 국내외 동포에게 고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우리가 처한 현 단계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에서 명시된 바와 같이 “대한민국 건국의 초기”가 시작되려는 단계임을 설파하면서 온 민족이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총단결할 것을 호소하였다.

해방과 함께 38도선으로 한반도를 분단한 미국과 소련은 각각 군정을 실시하면서 전체 한반도를 자기세력으로 넣지 못하면 반쪽이라도 자기 세력화하려는 분단 고착정책을 사실상 채택하였다. 미 · 소의 이러한 정책으로 임시정부와 백범은 1945년 11월 23일 개인자격으로 환국하였다.

백범은 환국 즉시 통일 대한민국 건국활동을 시작하였다. 1945년 12월 미 · 영 · 소 외상이 모스크바에서 미 · 소에 의한 남 · 북의 5년간 신탁통치를 결정하자, 백범은 즉각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하고,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여 의장으로서 반탁운동을 맹렬히 전개하였다.

백범은 미 · 소의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고, 내정간섭도 없이, UN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해서 “통일된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정부를 조속히 수립할 것을 촉구하였다. 당시 백범 노선이 국민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백범이 1947년 3월 20일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했을 때의 “건국”도 직접 “대한민국 건국”을 지칭하였다. 그간의 백범의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피땀어린 투쟁과 노력은 한 권의 책을 써도 부족할 것이다.

마침내 UN 총회에서 한국민족의 의사가 채택되어 1947년 11월 14일 UN감시하의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와 UN 임시위원단 설치, 통일정부 수립 후 미 · 소 양군의 철수안을 가결하였다. 백범은 이를 지지하였다.

백범은 이 UN 총회의 안이 통일 대한민국 건국의 기본안에 가장 합치된다고 생각하였다. 만일 불행하게 소련의 방해로 북한의 동시 선거를 실시하지 못하면 북쪽 지도자들과 사전 협상하여 그 의석을 남겨 두고 두 단계로 나누어 선거해서 합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소련은 우려했던 대로 UN 한국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거절하였다. 소련은 북한만이라도 소련 영향하에 두려고 했다.

그러자 한국인들에게 남북한 총선거 추진의 기회도 주지 않고 1948년 2월 26일 전체총회도 아닌 UN 소총회가 서둘러 “가능한 지역”에서라도 총선거를 실시하도록 의결하였다. 이것은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남한만의 정부수립을 의결한 것이었다. 백범은 UN 총회의 결의를 실시하기 위해 UN 소총회의 남한단독 선거 결의를 반대하고 한국인들에게 협상의 기회를 줄 것을 강력히 호소하였다.

백범은 “대한민국 건국”이 처음부터 “통일정부” 수립으로 시작해야지 남북에 각각 2개의 “단독정부”가 수립되면 불가피하게 동족상잔의 “내전” “전쟁”이 일어날 위험이 커서 민족의 참담한 불행이 오고 통일은 더 멀어진다고 설파하였다.

UN 소총회 결의가 발표되자 권력 추구 정치인들이 남쪽에서 먼저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북진통일”하면 된다고 단독 정부수립을 앞당기려 하였다. 일본군 출신들은 단독정부 추진 지도자에게 명령만 내리시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드실 수 있게 하겠다고 호언하였다.

북쪽에서는 서울의 동향을 보다가 이어서 단독정부를 수립해 이를 민주기지로 해서 “남진통일”을 하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백범은 몇 달 또는 1년이 더 걸리더라도 외세에 추종하지 말고 남북 지도자들이 모여 협상해서 처음부터 통일정부를 수립하여 동족상잔의 전쟁을 방지하면서 대한민국 건국을 실천하자고 호소하였다.

"두 동강 정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선거를 실시하여 남조선 정부를 수립하고, 군대를 양성하여 북쪽으로 쳐들어가겠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위험한 말이다.…

동족상잔과 망국멸족의 참극을 조장하는 자의 정체가 참으로 우리 한국 사람인가 생각해 보라. 그러면 우리 삼천만 동포가 당연히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이겠는가."

김구, ‘건국실천원양성소 1주년 기념식’에 보낸 치사 / 1948. 3.20,

백범은 마치 신탁통치 반대에 성공했듯이 동족상잔을 방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협상해 보려고, 1948년 2월 16일 “남북협상”과 “남북지도자회의”를 북측에 먼저 제의하였다.

북측은 침묵을 지키다가 뒤늦게 장소를 “평양”에서 하자고 응답해 왔다. 이때 북측은 백범이 평양까지는 못 갈 줄 예측했던 것 같다. 백범이 만난을 극복하고 육로로 평양을 가는 길목 도처에 다 지우지 못한 “김구, 이승만 타도”의 구호가 다수 남아있었던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백범이 이때 남북협상을 제의한 것은 중첩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첫째, UN의 힘을 빌릴 수 없게 된 상태에서 외세가 들씌운 구조인 남북분단의 2개정부에 순응할 것이 아니라 혈연을 같이한 동족끼리 마주 앉아 협상해 보아 하나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민족적 노력을 최후까지 수행해 보려는 것.

둘째, 신탁통치 반대에 성공했듯이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에 합의된다면, 38선 철폐, 통일 대한민국 건국, 전쟁방지, 세계평화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는 것

셋째, 남북협상이 소기의 성과를 못 내고 2개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경우에도 이것이 “평화통일의 제1보” “제1차 평화통일협상”이 되어 후손에게 통일은 “협상평화통일”로 추진하도록 인도하는 첫 걸음이 된다는 것

백범은 1948년 4월 19일 서울을 출발하여 남북협상을 하고 5월 5일에 귀경하였다. 그러나 국내외 정세는 급변되어 남쪽에서 1948년 5·10선거를 거쳐 7월 17일 제헌의회가 구성되고,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24일 후인 9월 9일에는 북한에서 김일성을 수상으로 한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백범은 “인민공화국” 수립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인민회의라는 것을 통하여 그들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헌법에 의하여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국기까지 바꾸었다.

물론 시기와 지역과 수단방법에서 차이가 있을지언정 반쪼각 국토 위에 국가를 세우려는 의도는 일반인 것이다. 이로부터 남북은 호상 경쟁적으로 국토를 분열하여 동족상잔의 길로 나갈 것이다. …

북한에 대하여 희망하는 것은 그들이 아직도 여유가 있다면, 금차의 과오를 시정하고 남북협상의 결과로 발표된 4월 30일부 공동성명에 제정된 대로 실행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홍명희 선생이 신속히 還京하여 최근에 전변된 북한정세를 우리에게 알려주기를 요청하는 바이다.“

‘제2차 남북협상에 양 김선생 공동성명’ 1948.7.19

백범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2개 정부가 전쟁으로 치닫지 말고 평화적으로 협상해서 “통일 대한민국”이 되기를 간절히 희망하였다.

백범은 1949년 정계를 은퇴하고 청소년 교육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친일세력과 분단세력은 연합하여 이미 정계를 은퇴해서 경호가 없는 백범 김구선생을 1949년 6월 26일 암살 시해하였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하여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3년간 민간인 동포만도 300만 명이 죽고 삼천리강토가 초토가 되었다.

백범이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희생해 바친 것은 바로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서였다. 백범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의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가장 큰 불멸의 공헌을 한 위대한 애국자이다. 단지 그는 2개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대한민국을 처음부터 1개 통일정부를 가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유민주국가“로 건설하고자 진력한 것이었다. 우리 대한민국은 결국 백범의 노선에 따라 평화적 방법으로 ”통일 대한민국“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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