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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독서감상문쓰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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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소개

수상작 소개 상세내용
제목 대한의 아버지 백범 김구를 기리며
작성자 이주혁(고양국제고) 개최일 2023-11-24 조회 548


대한의 아버지 백범 김구를 기리며


고양국제고등학교

1학년 1반 이주혁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나의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위 구절은 김구가 자신의 소원을 담은 말이다. 김구는 백범일지 마지막 부분에 나의 소원은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라고 밝힌다. 위와 같은 말을 한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백범은 조국의 독립에 대해 굉장히 열망적이고 꼭 이루고자 하는 바를 보여준다. 그의 자서전인 <백범일지>를 보게 되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백범은 왜 그토록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룩하고 싶었을까? 기나긴 일제의 간섭과 방해에서도 해방된 모습을 보았는데도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백범일지>를 통해 그가 왜 자주독립을 이루고 싶어했는지, 그가 바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백범일지를 읽게 되었다.

 

기존부터 역사에 흥미를 무척 느끼고 있었고 진로 희망을 역사로 정한 나에게 있어서 김구 선생님은 모를 수 없는 존재였다. 특히 근현대사에서는 빠질 수 없는 핵심적인 인물이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어릴 때부터 김구와 관련된 책을 다수 읽었을 뿐더러 매번 김구를 존경하는 인물로 뽑는 나로서는 백범일지는 가볍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건 나의 큰 오산이었다. 김구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자부한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몰랐던 새로운 이야기들이 속출하였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백범을 '우리나라 근대사에 없어서는 안되는 임시정부의 기틀이자 독립 운동가'라고만 단순히 정의 내렸다. 왜냐하면 김구하면 떠오르는 것이 임시정부와 독립 운동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내가 내린 정의가 무척이나 단순하고 어리석은 정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김구 선생님을 단순 독립 운동가이자 임시정부 주석이라고 정의할 수 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구는 어떤 인생을 살아온건가? 김구의 삶을 보았을 때, 그의 삶은 영웅 서사를 떠올리게 하였다. 큰 위기가 여러 번 있었지만 백범은 자신의 힘으로 혹은 조력자의 힘을 받아 매 위기 순간을 극복해 나갔고 자신의 성장을 북돋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도 나왔다시피, 그의 인생에서 큰 위기는 세 번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김구 인생 세 번의 위기 순간과 내가 기억에 남는 부분, 그리고 백범일지를 읽고 나서 나의 종합적인 생각에 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세 번의 투옥과 위기]

 

"이전에는 내가 아무런 생각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강도로 대우하거나 무엇으로 하거나 잠자코 있었다. 허나 오늘 내가 정당하게 할 말을 다했는데도 나를 이렇게 홀대한단 말이냐? 땅에 금을 그어 놓고 이것이 감옥이라 하더라도 그 금을 넘을 내가 아니다. 내가 당초에 도망할 마음이 있었다면 그 왜놈을 죽인 자리에 내 주소와 성명을 갖추어서 포고문을 붙이고 집에 와서 석 달이나 잡으러 오기를 기다리겠느냐. 너의 관리들은 왜놈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내게 이런 대우를 하느냐?"

 

김구는 자신의 인생에서 크고 작은 문제로 인해 세 번의 투옥을 하였다. 나는 세 번의 투옥 모두 김구의 입장에서 위기이면서 동시에 전환점이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치하포 사건으로 인한 투옥이다. 당시 조선은 을미사변으로 인해 혼돈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급하게 피신하며 말 그대로 '대혼란의 시기'였다. 중국으로 유학을 간 김구는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다는 소식에 급하게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에, 김구는 한 식당에서 칼을 찬 일본인을 보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미우라 고로'이거나 그의 공범이라고 생각하여 살해한 사건이 치하포 사건이다. 그 후 김구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숨기지 않고 밝히며 법정에 서게 되고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살인을 하였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백범은 사형 선고를 받게 되지만, 사형 당일 날 고종의 명으로 사형 집행이 취소되게 된다. 김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위험했던 이 사건으로 인해 김구의 평이 엇갈리게 된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 1년이 채 넘어가는 시점에서, 칼을 찬 일본인이라고 해서 미우라 고로 또는 그의 공범이라고 생각하고 살인을 저지른 부분은 굉장히 섣부른 행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만약 고종의 명이 없었다면 혹은 전화 공사가 준공되지 못해 고종의 명이 전달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임시정부의 기틀인 백범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김구의 입장에서도 이 사건을 계기로 독립 운동에 대한 열정이 높아지게 되면서 훗날 독립에 힘쓰는 김구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 사건은 김구의 입장과 훗날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결정적이고 중요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그 후 김구는 스스로 탈옥을 감행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스님이 되기도 하고 선생님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19091025, 선생님으로서 반일 연설을 하다가 구금 당하게 된다. 반일 연설로 붙잡힌 것은 별일 아니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구금된 다음 날이 결정적이다. 김구가 구금된 다음 날,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는 김구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당시 지지부진하던 독립에 대한 의지를 다시금 끌어올린 사건이었다. 게다가, 김구는 안중근과 어린 시절 큰 빚을 졌던 안 진사의 큰 아들로서 인연이 깊었다. 그렇기에 김구에게 있어서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은 당혹감과 동시에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품은 계기가 되는 것이다.

 

독립에 강한 의지를 품은 백범은 1910년 비밀 결사 단체인 신민회에 가입하게 된다. 당시 국내 상황은 일본이 마침내 우리나라 국권을 강탈한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한 탓에 많은 사람들이 자포자기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구는 일본에 굴하지 않고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게 된다. 그러다가 12월 안정근을 만나게 되고, 1911년 안악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다. 백범은 이 사건을 형문을 받고 징역 15년으로 수감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14년 비로소 모두가 아는 '백범 김구'가 탄생하게 된다. 그는 독립에 대한 의지를 더욱 다지는 결의를 바탕으로 '일제의 호적에서 이탈'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름을 '', 호를 백정과 범부도 애국심이 자신만큼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백범'으로 바꾼 것이다. 그렇기에 이 사건 또한 사람들에게 '백범 김구'라는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세 번의 투옥 모두 김구에게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품게 해주고 훗날 우리가 익히 아는 김구로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봉창과 윤봉길..잊어서는 안되는 그들]

 

"장지에는 제일 윗자리에 안 의사의 묘역을 잡아 놓고 차례로 3의사의 유골을 봉장하니 그날 참석한 유가족의 애도의 눈물과 각 사회 단체의 추도문 낭독에 태양이 빛을 잃은 듯했다."

 

훗날 김구에게 누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이봉창과 윤봉길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 정도로 김구에게 있어서 두 인물은 김구와 우리 대한의 전환점을 심어준 인물이다. 그들은 꺼져 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김구와 둘의 만남은 감히 운명적이라고 칭할 수 있다. 임시정부가 혼란 속에 빠져 홀로 임시정부를 지키던 김구의 고민이 하늘 끝까지 치솟을 때, 한 청년이 등장한 것이다. 그의 이름이 바로 이봉창이다. 이봉창은 점점 암담해지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우리나라 사람의 독립 의지를 끌어올리고 싶었던 것이다. 비록 이봉창이 일왕 제거에는 실패하였지만, 우리나라 국민들 뿐만 아니라 일본에 피해를 본 중국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다시금 일제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욕구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해 4, 청년 윤봉길이 김구를 찾아와서 독립 운동에 대한 의지를 밝힌다. 하지만, 김구가 독립을 하겠다고 오는 사람들을 마냥 반길 수 만은 없었을 것이다. 어린 청년을 보내는 김구의 심정은 어찌하였을지.. 괜히 죄책감이 느껴지고 혹여나 실패하면 무고한 청년 하나만 잃게 되는 건 아닌가 라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또한 윤봉길이 거사 당일 날 김구에게 말한 말도 감히 잊을 수 없었다. "제 시계는 6원을 주가 산 것입니다. 선생님의 2원짜리 시계와 바꾸시지요. 제 시계는 한 시간밖에 소용없는 물건입니다" 라는 말을 듣고 굉장히 울컥하고 감명 받았다. 이 말은 앞으로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다는 것을 알고 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때의 윤봉길 의사의 심정은 어떠하였을지.. 윤봉길 의사를 존경하는 나로서도 예상이 가지 않는다. 결국, 김구와 시계를 바꾸고 거사를 치르러 간 윤봉길이 일본 주요 인물들을 제거하였다는 소식이 들리며 전 세계에 우리나라 청년의 용감함을 알게 되었다. 김구가 그들에게 느낀 고마움은 말로 이룰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비참한 것은 이러한 감사함을 진정 느껴야 할 우리가 느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치른 희생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있고, 우리나라가 현재 온전한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와 같이 이름이 알려진 독립 운동가 말고 이름 모를 수많은 독립 운동가도 기억해야 한다. 우리 대한의 배반자인 이완용을 암살 시도한 이재명, 김구와 함께 밀정 처단에 앞장서고 한인애국단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이화림, 독립운동자금과 의열단을 지원한 애국지사인 이태준과 같은 분들 말이다.

 

[백범, 그가 바란 우리나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만 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백범이 원하는 우리나라는 '아름다운 나라'였다. 그의 인생관을 살피며 다시 한 번 느끼는 백범은 큰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크진 않더라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한다. 나의 소원을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나는 백범이 원하는 우리나라를 보자마자 전율이 돋았다. 김구는 이미 그때 당시에 문화의 힘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를 봐도 문화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19506.25 전쟁을 겪고 세계 최대의 최빈국으로 전락하였다. 실제로, 당시 1950년대의 경제 상황을 '원조 경제'로 표현할 만큼 여러 국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유지해갔다. 이 시기 우리나라가 받은 원조액이 297500만 달러에 달한다는 것은 남에게 100% 의존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 시기는 김구가 강조한 '다른 나라의 도움 없이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한 나라'에는 부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70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는 이제 선진국으로 불릴 정도로 성장해있다. 나는 우리나라가 이렇게 성장한 데에는 문화의 힘이 결정적이라고 본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외국인에게 "Do you know Korea?"라고 물으면 90% 이상이 알지 못하였다. 하지만, 현재 K-POP에 대해서 묻는다면 대다수의 외국인이 안다고 대답한다. 이렇듯, 우리나라를 발전케 한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이 문화의 힘을 계속해서 적극 활용한다면, 세계 강대국인 미국에 버금가는 나라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백범은 문화의 힘을 강조함과 동시에 '평화'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보통, 사람들은 가장 부강하고 힘이 세서 아무도 자신의 나라를 넘볼 수 없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백범의 생각은 달랐다. 백범은 본격적으로 문호가 개방되어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해인 1876년에 태어나서 광복 4년 뒤인 1949년에 인생을 마감하였다. , 인생의 90% 이상을 남의 나라에 침략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나라를 두 눈으로 목격하고 그것에 맞서서 투쟁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남의 침략이 얼마나 지옥 같은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에 가장 부강한 나라를 원하지는 않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의 제국주의를 보게 되더라도 당시 가장 힘이 센 영국이 대륙에 상관없이 식민지를 지배한 모습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백범은 자신이 지금껏 겪은 74년의 삶을 바탕으로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나라를 언급한 것이다. 이렇듯, 김구가 원하는 우리나라를 보고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김구가 원하는 우리나라가 지금의 우리나라에 부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큼, 강함은 남의 침략을 막을 정도로, 그리고 문화의 힘을 앞세운 나라.' 김구 선생님께서 흐뭇하게 지켜보리라 믿는다.

 

[정녕 애국심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하여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 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백범이 원하는 우리나라는 완성되어 가지만, 백범이 그토록 말하는 한 가지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바로 '완전한 자주독립'이다. 앞서서 언급했듯이, 김구의 소원은 오로지 조국의 독립이었다. 언뜻 생각하면 '1945815일 일제가 물러나면서 광복을 하였기에 독립한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김구가 강조한 것은 '자주독립'이다. 모두가 일왕의 항복 소식을 듣고 신이 나 태극기와 함께 거리로 뛰쳐나간 그날, 김구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왜냐하면 김구는 이미 일제를 직접 물리치기 위해 몇 년 동안 참전을 준비했기 때문에 이 모든 게 순식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백범은 이미 알았던 것이다. 미국에 의해 일본이 물러난다면 미국이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을.. 그렇기에 우리는 아직 김구 선생님의 소원을 이루지 못한 것이기에 더더욱 김구 선생님의 뜻에 따라 우리나라와 독립에 대해 고민하고 노력해야만 한다. 훗날 김구와 대면하는 순간에서 부끄러움은 느끼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백정과 범부의 애국심도 자신만큼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호를 '백범'이라 칭하고, 들끓는 애국심으로 국모의 원수를 복수하고, 독립에 대한 열정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일생의 모든 순간마다 나라를 먼저 생각한 그의 애국심에 존경심을 보이며 나 또한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변치 않으리라 다짐하게 된다.

 

[백범일지를 마무리하며..]

 

백범일지는 나의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해준 책이다. 백범일지를 읽으며 백범에게 받은 가르침은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그 중에 두 가지의 가르침만은 잊지 않으려고 한다. 첫 번째는 '외유내강'이다. 김구의 삶을 돌이켜 보았을 때, 그가 보인 모든 행실은 외유내강이라는 단어 하나로 정리된다. 외유내강이란 겉으로는 부드럽고 속은 곧고 굳셈을 나타내는 사자성어이다. 맨 처음, 나는 임시정부 경무국장을 하며 찍은 사진 속 김구의 모습을 보고 굉장히 거칠고 무뚝뚝해 보였다. 하지만, 김구는 관상학을 배우며 자신의 관상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좋게 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때부터 백범의 사람 대함은 정말로 온화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보였다.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는 어떠한 시련이 와도 꺾이지 않는 마음을 보이며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다. 실제로, 어린 시절부터 몹시 가난한 집안 때문에 또래 아이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상놈이라고 불리며 힘든 유년 시절을 겪었다. 그럼에도 그는 위축되지 않고 성장해 나가며 대한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내강' 덕분에, 죽을뻔한 고비도 넘기고 임시정부가 무너지기 직전의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멘탈이 약한 나로서는 그의 '외유내강'에 존경심을 느끼며 김구만큼은 아니더라도 외유내강의 힘을 기르기 위해 노력하리라 다짐한다. 두 번째는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다. 김구의 나라 사랑은 말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앞서서 말했듯이, 그의 인생은 대한을 위한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나를 포함해서 역사 시간을 통해 일제 강점기를 접하는 학생들은 나라를 잃은 슬픔에 크게 공감 하지 못한다.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오직 시험의 수단으로서 외우기 급급할 뿐이다. 나 또한 나라를 잃은 슬픔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주요 사건의 전개 순서에만 초점을 두어 일제의 통치 35년을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일제의 통치 아래 35년을 겪으신 김구 선생님의 삶을 바탕으로 나라를 잃었다는 것이 얼마나 비통하고 참담한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오죽하면 김구 선생님의 평생 단 하나의 소원이 완전한 자주 독립이란 말인가. 우리가 김구 선생님처럼 나라를 위하고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긴 힘들겠지만 현재 우리나라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내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와 같이 잠시나마 나라를 우선적으로 생각해보길 바라는 마음이다.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는지 고민해보며 작게나마 실천해 나간다면, 현재 하늘에서 우리나라를 바라보는 김구의 얼굴에 미소가 띠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백범일지를 통한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우리나라는 국민 개개인이 모두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나라이다.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이나 힘의 우위와 별개로 말이다. 실제로 행복 국가 순위를 보았을 때, 상위권에 있는 나라는 강대국인 미국, 러시아, 영국과 같은 나라가 아니라 핀란드, 덴마크, 아이슬란드와 같은 나라들이 상위권에 있다. 상위 10개의 나라만 봐도 경제 대국은 존재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물질적인 부는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예상하건대, 김구 선생님께서도 아마 이런 나라를 원하셨을 것이다. 물질적인 부가 너무 넘치지는 않고 국민 대부분이 행복함을 느끼는 나라.. 지금 우리가 행복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하며 74년 인생을 대한의 행복에 전념한 김구 선생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김구 선생님이 원하시던 나라, 더 나아가 전 세계에서 행복 국가 상위권에 위치하고 완전한 자주 독립을 이룩하는 그날까지, 김구 선생님을 기리며 그가 주신 가르침을 잊지 않고 명심하리라 다짐한다.

 

"소련식 민주주의가 좋다고 해도, 공산 독재정권을 세우는 것은 그르다. 미국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독점 자본주의로 인해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상품을 팔기 위한 시장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는 진실로 국제적으로 평등한 입장에서 남북의 친선을 촉진하면서, 우리 삼천만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 스스로가 잘 살 수 있게 하는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자주독립의 조국을 원할 뿐이다."

-백범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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